68혁명의 배경과 현대사회에서의 의의

68혁명이란 무엇인가?

68혁명은 1968년도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정치적 운동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보통의 사회 혁명이 위에서 아래로 이뤄지는 반면 이 68혁명은 기존의 권위주의, 보수주의에 대한 저항과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 대중의 움직임으로서 아래에서 위로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면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성년이 되면서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였지만 냉전 체제 하에서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 세대였습니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적 풍조에 반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이 때 발생한 문화적 변화로써 히피운동, 록 음악, 성 혁명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미국은 당시 베트남 전쟁을 치루던 중이였고 미국 내외적으로 반전운동이 활발히 발생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활발한 사회운동이 일어났는데 프랑스에서의 5월 혁명(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8혁명은 당시에 체제 전복이나 대규모 정치적 변화에는 실패하였고 이후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반격으로 전반적으로 급진주의적 세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평가되지만 현대에 이르러 68운동이 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68혁명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68혁명이 대학생과 노동자가 기존의 권위적 체제에 저항하며 발생한 정치적 운동이었던 반면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방식으로 평화와 사랑, 자유를 강조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습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1969년 8월, 3일간 뉴욕주 베델에서 열린 대규모 락 페스티벌로 “3일간의 평화와 음악(3 Days of Peace and Music)”이라는 슬로건 아래 약 40만명이 참여한 대규모 행사입니다. 이 페스티벌은 히피문화와 반문화를 대표하는 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68혁명의 정신이 문화적으로 표현된 행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히피문화가 성행했기 때문에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는 성 해방과 마약 사용이 두드러졌습니다. 히피들은 기존의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고 자유와 마약을 사용한 정신적 해방을 추구하였습니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빌헬름 라이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혁명적 사상가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제자였습니다. 그의 중요한 저서로는 성정치(Sexual Revolution)과 성혁명(The Sexual Revolution)이 있습니다. 빌헬름 라이히의 사상은 1960년대 히피 운동, 페미니즘, 성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에는 급진적인 이론이었지만 현대에 들어 성적 자유와 평등과 같은 문제를 논의하는데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성적 억압과 사회적 억압을 연결한 그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빌헬름 라이히는 마르크스주의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연결하여 성 해방 운동을 통한 사회 변화를 추구하였습니다.

빌헬름 라이히는 인간의 성적 억압이 경제적 착취와 권위주의 등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성적 억압은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습니다. 성적 자유가 결국에는 사회 혁명을 이루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여겼으며, 특히 청소년과 여성의 성적 자유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빌헬름 라이히의 사상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나타난 히피 문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성 해방이 강조된 문화적 변화를 촉구시켰습니다.

마오의 문화혁명

마오의 문화대혁명운동(1966~1976)은 1950년대 시행한 대약진 운동이 실패함에 따라 마오쩌둥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사회주의적 순수성을 강화하기 위해 시작한 운동입니다. 이 운동으로 인해서 수백만명이 정치적 박해를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사망하였습니다. 주로 젊은 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병(Red Guards)들이 기존의 권위와 전통을 공격함으로써 학자, 예술가, 지식인 등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처형되었습니다.

마오어록(The Little Red Book)을 근간으로 한 홍위병들이 기존의 전통과 체제를 부정함으로써 교육기관, 공장, 행정체계가 붕괴되고 많은 전통문화와 유물, 역사적 유산이 파괴되었습니다. 과정중 지식인과 전문가 계층의 붕괴로 인해 중국의 경제력과 교육 수준이 심가하게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문화혁명이었지만 서양에는 마오의 사상적 배경과 마오어록만이 전달되면서 68혁명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양의 젊은이들은 보수적인 교육 시스템, 권위적인 정치 체제, 자본주의, 불평등에 대해 비판하였고 이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68혁명과 문화대혁명의 이념적 배경은 마르크스주의가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오의 문화대혁명은 서구의 68혁명 세대에서 급진적 변혁의 모델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8혁명의 의의

오늘날 68혁명이 새롭게 조명을 받는 이유는 당시에 실패라고 여겨졌던 정치적 운동이 지나고 보니 사회주의가 융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그람시의 기동전과 진지전의 구분 중 68혁명은 진지전으로서 종교개혁으로 인해 전통이 강한 서구 사회에 장기적으로 교회, 학교, 정부를 장악하기 위한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에 뿌리를 둔 자유민주주의는 건강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에 의한 지배(Rule of Law)를 중시하고 개인의 인권과 자유권을 중시하는 서구 사회의 기반에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담겨 있고 이는 가정에서 세대를 통해 전해지는 가치였습니다.

하지만 성 해방을 추구하는 68운동의 정신에서는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 외에 다양한 비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용인함으로써 서구의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서서히 파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없어지고 정치적 올바름(PC)으로부터 대중으로부터 사회적 진리가 시시각각 바뀌는 사회가 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은 설사 그 시도가 성공하였다 할지라도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개인과 가정이 있다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반면, 이렇게 오랜 시간 무너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인해 회복력이 떨어진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 지 알 수 없는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진 말기암 환자와도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PLI 운동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고 개념을 탑재하여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 시대에 지식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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